환경감시일보, ESG 데일리 김동민 기자 |
이승만 건국대통령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다녀와서
류재권 재경 합천군 향우( 세계 숲 보존협회 사무총장)
2025년 3월 25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우남 이승만 세계를 넘어 세대를 잇다】라는 주제로
서울 장충단 공원에 있는 【자유총연맹 크레스트 21 글라스홀】에서 합천 출신 송대성 박사(전)세종연구소 소장 (현)한미연합회 한국 회장, 한국독도역사문화아카데미 이상우(초계)총재. 방호재(적중)갤러리 대표를 포함 이승만 기념재단 관계자 및 시민 300여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 기념재단」 주최로 탄생 150주년 맞이 기념행사 및 학술발표가 열렸다.
개회식에서 김황식(전)국무총리, 이승만 대통령 기념재단이사장의 환영사에 이어 이기수 (전)고려대 총장의 격려사, 특별순서로 150주년 엠블럼 발표가 있었다.
학술회의 1부 주제로 『대한 근대화 청년 이승만』을 주제로 발표1. 이영훈(전)서울대 교수의 「조선의 쇠퇴와 청년 이승만」, 발표 2 김명섭(전)연세대 교수의 『청일전쟁과 청년 이승만』을 주제로 발표에 이어 3분의 토론자가 토론했으며, 2부에서는 청년세대 원탁회의 『21세기 대한민국 청년들이 생각하는 19세기 청년 이승만』을 주제로 4분의 발표가 이어졌으며, 3부에서는 『대한민국 미래세대 대한민국을 다시 배우다』발표가 이어졌다.
본 기자가 이날 발표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일대기를 살펴보고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망국과 비운의 시대 구국의 선각자 이승만
이승만은 조선의 왕족 출신으로 한학에 정통하였으며, 배재학당에서 서양학문을 접했다.
자유, 평등, 인권 등의 근대적 이념으로 무장한 청년 시절부터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투쟁했다. 협성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구국의 필봉으로 외세에 대항했으며,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의 명연설자로 활약했다. 한국의 독립을 다룬 「독립정신」을 집필했으며, 고종황제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하는 등 구국 외교활동을 펼치다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미국 유학의 길을 택했다.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프린스턴대학에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식민지로 전략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험난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택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와이에 한인 기독교학원 및 한인 기독교회를 창립하여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았다. 3·1 운동 이후 이승만은 우리 민족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또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대한인 총대표회의를 개최하고 1919년 4월 23일 전국의 13도 대표로 구성된 한성임시정부에서 집정관 총재로 선출되었다.
영문 국가 명칭 【Republic of Korea】 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1919년 9월 6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태평양 전쟁을 예언하고 세계 속에 대한민국을 외친 독립 운동가
1941년 8월에 출간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에서 일본의 미국 공격이 임박했음을 주장했다. 발간 4개월 만에 실제로 일본이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의 오랜 외교활동이 결실을 맺어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국이 우리의 독립을 약속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대한민국 국가를 건국한 우남 이승만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역사의 가장 어두웠던 시대를 밝힌 희망의 불빛이었다. 대한 제국기에 게몽운동과 구구 투쟁을 펼쳤고, 일본에 국권을 탈취당한 후에는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해방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에 헌신했다.
해방에서 건국에 이른 길은 험난했다. 38선 이북에는 소련의 조종을 받은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이남에는 남로당이 집요한 공산당 투쟁을 전개했다. 1945년 10월 16일 33년만에 조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외치며 좌우를 막론하고 모든 정치세력이 일치단결하여 새 나라를 건설하는데 동참할 것을 주장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승만은 이에 반대하여 한국 문제를 UN에 이관할 것을 주장했다. UN 에서는 남북한 자유선거와 유엔 한국위원단의 파견을 결의했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남북한 총선거가 거부당하자, UN 소총회는 선거가 가능하고 인구의 2/3 가 거주하는 남한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세우도록 결의했다. 1948년 5월 10일 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승만은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국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1948년 7월 17일 공포한 제헌 헌법에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임을 명시했다.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 세계에 선포했다. 1948년 12월 12일 UN 총회는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 세계적 성공 사례인 농지개혁을 단행한 농노 해방 대통령
1950년 3월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단행 경제적 민주혁명이자 5천년 우리 역사상 최초의 농노해방이며, 진정한 신분 차별을 철폐였다. 이로서 전 농지의 92.4%를 자작농이 소유하게 된 세계적인 성공 사례였다
▶한미동맹으로 안보 100년 대계를 구축한 안보 대통령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남한을 기습 공격했다. 절대적으로 약세였던 대한민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 연합군의 참여를 이끌어 내어 국가와 국민을 지켜냈다. 휴전이 성립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요구하여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의 후손들은 여러 대에 걸쳐 이 조약의 혜택을 누릴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한미동맹으로 60년 넘게 전쟁이 없는 장기간의 평화를 누리며 경제 발전에 전력을 기울였다.
▶의무교육과 인재 육성을 추진한 교육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으로 미래의 번영을 준비했다. 1949년 6년제 의무교육제를 도입하여 문맹퇴치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그 결과 1945년 78%에 달했던 문맹률은 1959년에 22%로 낮아졌다.이승만 정부가 길러낸 인재들은 1960년에 본격적으로 진행된 근대화, 공업화의 주역이 되었다. ’한강의 기적‘은 교육대통령 이승만의 선견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산업부흥 기술입국으로 시장 경제 발달을 촉진한 경제 대통령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함께 확보한 8억불에 달하는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1954년에는 산업부흥 5개년 게획을 수립하고 1955년에는 문경 시멘트 공장과 충주 비료공장 기공식을 거행하여 60년대 수출공업화 정책의 초석을 놓았다.
▶3·15 부정선거와 이승만 대통령 하야
1960년 3월 15일 선거에서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부통령으로 이기붕 후보를 내세웠다. 선거를 앞두고 조병옥 박사가 2월 초에 지병으로 서거하자 이 대통령의 연임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부통령으로는 장면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자유당에서는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이에 저항하여 4·19 학생 의거가 일어났다. 86세의 고령이던 이대통령은 시위 과정에서 부상당한 학생들을 찾아갔다. 할아버지 대통령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을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은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한다” 는 성명을 발표하고 사임했다.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애국자를 배웅했다.
▶ 하와이 유폐 건국 대통령의 유언
4·19 이후 소용돌이 치는 상황은 건국대통령 내외를 하와이로 떠나갔다. 우리 건국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만 90세를 일기로 하와이에서 숨을 거두었다. 실로 이승만의 생애는 자유를 향한 투쟁이었다. 조선의 봉건제, 일본의 제국주의, 세상을 휩쓴 공산주의에 맞서서 한민족의 자유를 지켜냈던 찬란한 생애였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도록 , 자유를 지켜야한다”는 말씀이 건국 대통령의 유언이었다. 이승만 박사께서 그토록 사랑했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90년의 거대한 생애를 조국의 재단에 바쳤던 건국대통령의 마지막길을 애도했다.